스마일은 PC통신을 통해 데뷔한 '유일한'님의 '어느날 갑자기'라는 소설에도 등장합니다.

아래의 소설을 읽어 보신후, 한 여름밤 공포이야기에 등장하는 술집에서 그 이야기의 진실을 직접 가려보는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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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에서는 작가이신 유일한님도 가끔 보실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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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님의 '어느날 갑자기'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제목 : 스마일

술은 악마가 바쁠 때 인간에게 사용하는 첫번째 무기이다.

                      -탈무드 중에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의 단골 술집이 있을 것이다.
단골 술집은 언제나 푸근하고 편한 분위기를 제공해 주며,
가끔은 주머니가 빈 상태라 할지라도 외상으로도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사람들은 그런 술집에서 수많은 추억과 무용담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취한 자신의 모습과 타인의 모습을 보곤한다.
때로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절대로 자신은 볼 수 없고 또 기억할 수도 없는 자기 모습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술로 인해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술은 악마가 인간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마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악마는 분명 존재한다. 천사 또한......

악마와 천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여러가지 직업으로 자신을 감춘 채......

천사들은 상담소나 거지, 거리의 부랑아, 선물가게, 꽃집 등을 하며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
그래야지만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고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반면,악마들은 술집이나 여관, 카바레, 나이트 클럽 같은 곳을 선호한다.
인간이 방탕할 때야말로 손쉽게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부터 악마가 운영하는 한 술집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얼마전에 이 술집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반포대교를 건너 강남 쪽으로 건너와서 구반포 쪽으로 우회전을 하면,
이수 교차로 때문에 항상 정체를 이루는 3차선 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육교를 세 개 정도 지나면 2층으로 된 허름한 상가가 나온다.

눈이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 상가가 시작되는 곳에서 `스마일'이라고 쓰여 있는
자그만한 입간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안주가 실내 포장마차 치고는 맛있고 고급스러운 편이지만, 그만큼 비싼,
어쩌면 평범한 서너 평 남짓한 작은 술집이다.

이 술집은 언젠가부터 이곳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파고 들어가 보면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이 술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 술집에 들렀던 손님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만약 이 글을 읽은 사람 중에서 이 술집에 들를 일이 있으면 술집을 잘 관찰해 보기 바란다.

외눈박이 고양이가 탁자 밑에 웅크리고 있는지, 주방에서 가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 오는지,
체리 소주에서 피맛이 나는지......

당신 또한 언제 이런 술집에 들어갈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결코......

 

1.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퍼부어 대던, 끈적끈적한 여름날이었다.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 광수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요즘은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황금기였다.

광수는 젊은 날을 사법고시에 다 바쳐야 했다.
남들이 축제다 연애다 서클 활동이다 해서 대학 생활을 만끽할 때,
도서관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두터운 법전과 씨름해야만 했다.
중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연락이 뜸해지자 서서히 멀어져 갔고, 이내 타인이 되어 갔다.
광수는 개의치 않고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대학 2년까지 다니다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 가서도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화장실에도 그냥 가는 법이 없었다.
형법이나 민법책을 들고 가서 다리가 저리도록 읽고 또 읽어 다 암기했다 싶으면
비로소 밑 닦는 휴지로 사용하곤 했다.
광수는 복학을 하자마자 다시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죽자사자 공부했지만 시험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일차에 붙으면 이차에 떨어졌고, 이차만 붙으면 되는데도 다음해에 또 떨어졌다.
그때마다 광수는 자신과 함께 신을 저주했다.
그리곤 악마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영혼을 가져가도 좋으니 시험에 꼭 붙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에 광수는 마침내 그토록 원했던 사법고시 일이차에 전부 합격할 수 있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하며 시험을 치뤘는데 며칠 지나자 마침내 합격증이 날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합격증을 받아 쥐자 부모님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버지는 광수를 끌고 자동차 대리점으로 가서 멋진 차를 한 대 뽑아 줬다.
마침내 대학교 일학년때 따놓기만 한 운전면허증을 써먹을 기회가 온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가 날아들었다.
친지들은 물론이고 광수의 이름조차 잊고 사는 줄 알았던 친구나 선후배들이
자신의 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그 동안 서먹서먹했던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열흘 동안에 여섯 번이나 술자리에 불려 다녀야 했다.
오늘은 일곱번째 술자리로써, 상대는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친구들은 카페에 모이자 나이트 클럽이나 가라오케에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광수는 오늘만은 `스마일'이라는 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광수가 `스마일'이라는 술집에서 술을 마셔야 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학교 도서관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다 보면 학교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술집들이 유혹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광수는 이를 악물고 유혹을 뿌리쳐야했다.
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가다보니 언젠가부터 `스마일'이라는 작고 빨간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수는 입간판을 보면서 나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꼭 저 집에서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셔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힘들고 지친 날도 `스마일'이라는 술집 간판을 보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광수의 뇌리 속에 문신처럼 박힌 술집 `스마일'......

스마일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바로 광수가 원했던 그 모든것이 이루어졌음을 뜻했다.
그런데 마침내 그날이 왔다.
오늘이 비로소 그 소원을 푸는 날이었다.
광수가 좋은 술집이 있다고 하자,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따라 온 친구들은
광수가 `스마일'에 들어서자 처음에는 몹시 실망했다.
다른데로 가자는 걸 광수가 다음에 가자며 가까스로 설득하자 모두들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입간판은 무수히 보았지만 술집 안까지 들어와 보기는 광수로서도 처음이었다.
친구들이 이것저것 술과 안주를 시켰다.
술을 마시다 보니 규모는 작지만 광수가 그려 왔던 바로 이상적인 술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도 아주 다양했다.
싱싱한 아나고 회서부터 맛있는 계란말이, 이름부터 신기한 오징어 스파게티 ......등등.
주인 아주머니도 아주 친절했다.
둘이서 술집을 운영하는 모양인데 둘 다 인상이 좋고 싹싹했다.
오늘따라 술이 잘 받았다.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술을 마시다 보니 자랑하느라고 차를 가져온 것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다.
세워 놓고 내일 가져가지, 뭐. 광수는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술자리가 점점 흥겹게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술은 달콤했고 안주는 입에 짝 달라붙었다.
또한 아주머니들이 간간이 가져 오는 서비스 안주는
술자리를 뜨게 할 생각을 잊게 할 정도로 허전한 입맛을 채워 줬다.
광수는 점점 술에 취해 갔다.
다른 술자리 같지 않고 속도 편했으며 기분도 갈수록 좋아져 갔다.
술을 마시다 보니 뭔가가 광수의 다리를 건드렸다.
탁자 밑을 내려다보았다.
광수는 술김에 고양이의 목덜미를 들어올렸다.
순간 `캬옹!'하며 고양이가 광수의 손등을 할켰다.
놀라서 떨어뜨리자 고양이가 주방 쪽으로 재빨리 달아났다.
친구들이 `와아-'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고양이를 가로막았다.
병훈이가 고양이를 들어올렸다. 지저분한 검은 고양이였다.

"하핫! 이놈 애꾸눈 잭인데!"

병훈이가 고양이를 쳐다보며 말하자 모두들 웃어댔다.

"너 여자야,남자야? 이 오빠하고 연애 한번 할래?"

병훈이가 고양이의 입에 입을 맞췄다.

"야옹아,절대 연애 같은 것 하지 마라.저놈 장래가 아주 불투명한 놈이다.
이왕 연애하려면 장차 법관이 되실 광수하고 해라."

정호가 한마디하자 모두들 술집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는 한쪽 눈으로 광수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광수는 고양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지만 태연히 술잔을 들었다.
고양이가 할퀸 손등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비야,여기서 기웃거리지 말고 주방으로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가 오이와 홍당무를 썰어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그제서야 병훈이는 고양이를 놓아 주었고, 고양이는 쏜살같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나자 술자리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광수야,나 먼저 일어날께.오늘 미국에서 삼촌이 돌아오시는 날이라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해."

"어,정호 너 일어날 거니? 그럼 나도 가야겠다. 나 졸업논문도 준비해야 하거든.
광수야, 사시 합격 진심으로 축하한다."

일한이도 뒤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야,우리 오늘 끝까지 가기로 했잖아. 너 치사하게 이러기야?"

광수가 만류했지만 두 친구는 기어코 자리를 뜨고 말았다.
두 사람이 가고 나자 술자리 분위기는 더 썰렁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빈 자리를 지우기 위해서 더 빨리 술을 마시고, 더 크게 떠들었지만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모두들 빨리 마신 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변해갔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말다툼을 하다 다시 한 친구가 떠나갔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술자리가 엉망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는 다섯 개의 눈이 있었다.
그 눈은 두명의 아주머니와 고양이 아니, 살쾡이의 눈이었다.
머리에 빨간 핀을 꽂은 아주머니는 체리 소주를 만들면서
노란 핀을 꽂은 아주머니에게 인사불성이 되어 가는 광수를 턱으로 가리켰다.

"오늘 사냥감은 저 자식이야. 저 자식은 우리에게 영혼을 담보로 시험에 합격 했거든.
저 자식은 지금 인생의 환희를 맛보고 있어. 저놈의 영혼은 한껏 들떠 있지.
우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때? 재미있지 않아?"

그녀는 살쾡이를 들어올렸다.

"나비야, 네 피를 다오. 인간의 영혼을 혼탁하게 할......"

그리곤 살쾡이의 다리를 예리하게 그었다.
더러운 털을 타고 붉은 피 한방울이 체리 소주에 떨어졌다.
술은 이내 더욱 붉게 변해갔다.

"난 저놈을 택하겠어. 저놈도 요즘 애인하고 한창 재미가 좋지.
한껏 들떠 있던 계집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호호홋!"

노란 핀을 꽂은 아주머니가 목젖을 드러내고 웃었다.
광수는 친구들과 주방에서 들여 오는 여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의 맥박이 빨라지며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조급해 할 것 없어. 오늘은 실컷 마시는 거야!'
라는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 왔다.
광수는 다시 의자에 상체를 기대며 술잔을 들었다.
병훈이 잔을 부딪쳐 왔다.
병훈도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잔뜩 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전혀 취하지 않았다며 맥주와 체리 소주를 한 잔씩 번갈아가며 마셨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친구들이 그만 일어서자고 재촉했다.
광수는 밤새 마시자고 제의했지만 모두들 하나씩 변명을 해댔다.

"야야, 오늘 너무 과하게 마셨어."

"그래! 이제 우리도 대책 없이 술 마실 나이는 지났잖냐? 오늘만 날이냐, 다음에 마시자!"

"치사한 자식들! 좋아, 가려면 가!"

광수는 친구들을 붙잡기 위해서 소리쳤다.
설마, 갈까 싶었는데 친구들은 `미안하다'며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친구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갔다.

"너희들은 인마 친구도 아냐!"

광수는 멀어져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다 술자리를 둘러보았다.
여덟 명이서 마셨는데 모두 가 버려서 이제 남은 사람은 병훈이뿐이었다.
병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병훈이의 벌어진 입을 타고 침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

"야,일어나. 너랑 나랑 이차 가자!"

광수가 상체를 흔들며 소리치자 병훈이 한참 뒤에 눈을 떳다.
눈동자에서 파란 광채가 뿜어져 나왔는데, 아까 보았던 외눈박이 고양이의 눈빛같았다.

"얼마예요?"

병훈을 일으며 카운터로 가며 광수가 물었다.

"친구분이 계산하고 가셨어요.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광수는 병훈과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을 나왔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니 술이 깨는것 같았다.
몸도 전에 없이 개운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으레 속이 느끼하거나 메슥거렸는데 오늘은 그런 증상도 전혀 없었다.
술병이 빌 때마다 아주머니들이 재빨리 치워 주곤해서 몇 병을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지막지하게 마셔 댄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병훈아, 우리 이태원가서 이차할까?"

"이태원? 좋지?"

술을 많이 마신 때문인지 병훈의 음성이 잠겨 있었다.
흡사 군대 있을 때 몇 번 들었던 살쾡이 울음소리 같았다.
택시를 타려고 하니 귀찮게 느껴졌다.
정신도 맑아서 운전해도 별 문제 없을 것만 같았다.
재수없이 경찰에게 잡히지만 않는다면......
광수는 세워 놓은 승용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병훈이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운전석에 오른 광수는 음악을 틀었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흘러나왔다.
평소에는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가 차창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섞여 으시시하게 들려 왔다.
술을 마셨으니 조심해서 운전해야지!
광수는 안전벨트를 매며 속으로 다짐을 했다.
시동을 걸고 빗속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늦은 시각이어서 인지 차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광수는 반포대교 쪽으로 진입하기 위해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콰과광!'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가 쳤다.
번개가 잠시 번쩍 했을때, 광수는 앞 유리에 비친 병훈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 그건 병훈이가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살쾡이의 모습이었다.
광수는 재빨리 옆을 돌아보았다.
병훈은 의자에 기댄채 자고 있었다.
술김에 헛것을 본 모양이었다.
창문을 열고 잠시 비를 맞았다.
후덥지근하고 끈적거리는 빗물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좋았던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이태원에 가면 좀 나아지겠지. 광수는 핸들을 꺾어 반포대교로 진입했다.
반포대교는 텅 비어있었다.
좌우로 늘어선 가로등과 확 뚫린 도로를 보니 속도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광수는 정면을 바라보며 액셀레이터를 지긋이 밟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빠르게 좌우로 스쳐지나갔다.
아찔한 쾌감이 느껴졌다.
속도계의 바늘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150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반포대교를 거의 다 넘었을 때였다.
광수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엑셀 레이터에서 발을 서서히 뗐다.
그때였다 옆에서 얌전히 자고있던 병훈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핸들을 잡고 있는 광수의 손을 붙잡았다.
100 킬로미터가 넘게 달리는 차는 순식간에 비틀거렸다.

" 얀마! 장난치지마, 위험해!"

광수는 놀라서 병훈에게 소리쳤다.

" 끄으으....네 친구는.....이미 죽었어. 이번에는.....네 놈 차례야..."

소름끼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광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병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검은 털이 징그럽게 난 외눈박이 살쾡이가
파란 눈으로 광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광수는 재빨리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자동차는 다리 난간을 들이받으며 밑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 했다.
얼굴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아, 안돼! 순간적으로 죽음을 느낀 광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의식이 끊기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보냈던 날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이대로....허망하게....죽을...수는....없어....
하지만 광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갔다.
반포 경찰서의 교통계 박 순경은 월별 교통사고 통계를 내고 있었다.
나흘 전에 있었던 사고 보고서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안 순경이 점심 먹으러 가자며 다가왔다.

" 아무래도 이상해...."

" 뭐가 ?"

박 순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하자 안 순경이 물었다.

" 벌써 이번 달 들어서만 네번째야.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야.
요즘은 술마시고 운전하다가 반포대교 난간 들이받기가 유행인가?"

" 음주운전이 문제는 문제야."

"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것은 말이지,
원래 사고가 나면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운전자는 덜 다치게 되어 있거든."

" 그렇지. 앞에 장애물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게 되어 있으니까."

" 그런데 네 건 모두 운전자가 사망했어. 조수석에 앉은 사람만 살아난 경우는 두 건이고 말야."

" 참, 나흘 전에도 빗길에서 사고가 났었잖아. 그 두 사람 부검 결과 나왔어? "

" 응. 예상했던대로 음주 운전이었어. 그때 운전했던 친구가 사법고시를 패스했더라고."

" 아까운 친구가 죽었군. 젊은 나이에..."

"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말이지,
조수석에 탔던 친구의 혈중 알콜 농도를 측정해 본 결과 사고가 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거야."

" 그럼 죽은 사람을 태우고 운전했다는 거야 ?"

" 모르지 뭐. 하도 요상한 세상이니까."

" 박 순경, 고민 그만하고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2.

전에 없이 긴 장마가 계속 되고 있었다.
태풍을 동반한 장마 전선은 물러날 줄을 모르고 남부 지방과 중부 지방을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 술....."

문씨는 술병을 기울여 봤지만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 개자식 !"

문씨는 술병을 쓰레기통에다 내동댕이 쳤다.

- 이봐 내가 김씨를 떠밀었어, 때렸어?
발을 헛디딘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이제와서 보상금을 달라는 거야.
다들 내가 집장사해서 떼 돈 번 줄 아는데 그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나, 집장사하다가 까먹은 돈이 자그마치 삼억이야, 삼억!
법대로 하든지 주먹 가지고 하든지 나는 모르겠으니까 문씨 꼴리는 대로 하라고!
홍 목수의 음성이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 나쁜놈! 내가 누구때문에 허리를 다쳤는데 오리발이야, 오리발은..."

문씨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다시 홍 목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 돈? 돈을 빌려달라고? 옛말에도 있어.
새벽에 발기 안 되는 놈하고 허리 병신에게는 절대 돈 빌려 주지 말라고.
돈도 없을 뿐더러, 설령 있다 해도 내가 문씨를 뭘 믿고 빌려 주겠어?
도데체 문씨가 가진게 뭐 있어?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문씨는 우산도 없이 비틀거리며 공원을 나섰다.
문씨는 집을 나와 구멍가게에서 산 소주 세 병을 공원 한켠에 있는 오두막에 앉아,
처량하게 내리는 비를 안주 삼아 모두 비워 버렸지만 술에 대한 갈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젠장! 또또복권만 사지 않았어도 소주 몇 병은 더 마시는 건데...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또또복권을 산 게 후회스러웠다.
주머니에는 술 한 병 값은 고사하고 여섯 살짜리 딸 진아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없었다.

- 문씨, 아무래도 축대가 위험해.
이렇게 금이 심하게 갔잖아.
축대가 무너지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거야?
장마가 끝날 때 까지만이라도 잠시 집을 옮기라고. 반장의 음성이 불쑥 떠올랐다.

" 미친년! 누가 위험한지 모르나?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이사는..."

문씨는 세상이 야박하게 느껴졌다.
모두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했다.
위해주는 척, 걱정해 주는 척....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손해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함께 사는 이웃'이니 '돕고 사는 사회'는 말 뿐이었다.
모두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망할 놈의 세상!
문씨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술 생각밖에 없었다.
아니, 가끔씩 진아의 천진난만한 눈빛이 떠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술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젠장! 쌀 살려고 남겨 놓은 돈으로 복권을 사고 술을 마셔 버렸으니...죽어야 해!
어린 딸년 하나 돌보지 못하는 무능한 놈은...
문씨는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길을 걸었다.
어둠이 깔린 거리는 인적이 뜸했다.
차들이 가끔씩 고인 빗물을 튀기며 질주해 갔다.
술이나 한 번 원없이 마셔봤으면....
비틀거리며 빗속을 걸어가며 문씨는 사방을 살폈다.
문을 연 가게라도 있으면 술을 훔쳐서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걷다보니 붉은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술집 간판 같았다.
문씨는 술집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상한 힘이 문씨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좀더 가까이 가자 '스마일'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옆에는 '실내포장마차' 라고 쓰여져 있었다.
퍼뜩 술을 더 마실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는 한푼도 없었지만 그건 먹고나서 고민할 문제였다.
문씨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술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문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초리에는 경멸이 묻어 있었다.
문씨는 그제서야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가뜩이나 옷차림이 후줄근한 데다 비까지 맞아 영락없는 거리의 부랑자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 비 한번 지랄 맞게 오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의자에 걸터앉으며 문씨가 중얼거렸다.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해 하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메뉴판을 갖다 줬다.

" 여기, 대합탕하고 소주 주슈."

문씨는 슬쩍 메뉴판을 들여다보고는 곧바로 주문했다.
안주보다 술이 먼저 나왔다.
문씨는 술을 잔에 따라서 입 안에 털어 넣듯이 마셔 댔다.
술맛이 기가 막혔다.
잔이 너무 작아서 양이 차지 않았다.
주머니에 돈만 있다면 맥주 글라스를 달라고 해서 술을 마시거나 병나발을 불텐데,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위축이 돼서 그럴 수도 없었다.
술을 새로 시켜 반 병 남짓 비웠을 때 안주가 나왔다.
대합탕 맛은 기가 막힐 정도로 맛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아내가 끓여주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술도 술 같지 않고 시원한 샘물 같았다.
안주로 빈속을 덥히며 마시다 보니 순식간에 세 병을 비웠다.

" 이건 서비스요. 천천히 마시구려.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머리에 빨간 핀을 꽂은 후덕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닭똥집을 갖고왔다.
문씨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 술 마시는 게 예사롭지 않구려. 무슨 일이라도 있수?"

그녀는 맞은편 의자에 슬그머니 걸터앉으며 물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을 듣자 마음이 흔들렸다.
이토록 다정한 음성과 부드러운 미소를 띄울 수 있는 여자라면
모든 고민을 털어놓아도 결코 경멸하거나 천대할 것 같진 않았다.

" 휴우...나처럼 재수없는 놈도 없을 거요. 제기랄!"

문씨는 술을 한 잔 쭉 들이키고 나서 이제까지 가슴에 묻어 두었던,
쌓이고 쌓인 한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한마디로 개 같았수다.
행복했던 시기는 노루 꼬랑지처럼 아주 짧았지요.
아주머니가 보기에 내 나이가 몇이나 된 것 같수?
아마 마흔대여섯은 먹어 보일 거요.
내 본래 나이가 몇인지 아슈?
서른여섯이요, 서른여섯.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모조리 이고지고 살다 보니 나이 서른여섯에 이렇게 팍삭 늙었수다.
난 솔직히 태생도 모르는 놈이우.
아비가 버렸는지 어미가 버렸는지 백일 갓 넘어서 남의 집 앞에다 버렸지 뭐요.
문호엽이라고 적은 쪽지 하나 덜렁 강보에 넣에 가지고...
그런데 주은 년놈들도 마찬가지지.
주웠으면 키우면 될 일이지 날 고아원에다 맡겼지 뭐요.
복도 지지리도 없지...
고아원에서 고생만 무지 했소.
구두닦이, 신문 배달, 껌팔이... 안해 본게 없었소.
맞기도 더럽게 많이 맞았지.
그래서 국민학교 졸업하자마자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왔죠.
그런데 어디 갈데가 있어야지?
설탕 공장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한 삼 년 일하다가 불현듯 공부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때려치우고 고물장사를 했수.
낮에는 손수레 끌고 다니면서 고물을 수거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지요.
그러다가 중학생 애한테 자전거를 한 대 샀는데,
그놈아 아비한테 도둑놈으로 잡혔지 뭐요.
내가 샀다고 해도 안 믿는 거에요.
그러다 결국 자전거를 판 놈하고 대질 심문을 했는데
그 자식은 나에게 판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거지 뭐요.
결국 파출소로 갔죠.
그런데 순경이란 것들이 내가 고아에다 고물장수라고 내 말을 믿지 않고 그쪽 말만 믿는 거요.
결국 절도죄로 소년원에 갔는데 너무도 억울해서 그때는 정말 눈에 보이는게 없습디다.
매일 복수할 계획만 세우다가 나중에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들어 복수도 포기했죠.
억울하기는 하지만 어쩌겠소?
돈 없고 빽 없는 놈의 설움이려니 해야지...
내가 살면서 억울하게 당한 이야기만 모두 늘어놓아도 밤샐거요.
하여튼 난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소.
내가 고아원에서 살면서 원장에게 배운 것은 딱 한가지 뿐인데 그건 빵잽이가 되지 말라는 거였소.
한마디로 나쁜 짓하고 살지 말라는 거요.
빵잽이가 되지 말자!
웃을지 모르지만 이 말이 나의 좌우명이오.
사실 나 전과 삼범이오.
별 두개는 누명으로 단 거고 하나는 폭력 전과요.
난 어디가도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소.
나 별 세개뿐이 없다고......
만약에 내가 `빵잽이가 되지 말자!'는 좌우명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았다면
아마도 별 열댓 개는 달았을 거요.
그만큼 범죄에 대한 유혹도 많았소.
하지만 이 문호엽이 비록 가난하게 살지언정, 여태껏 남의 물건 한번 탐해 본 적 없고,
내 배 부르게 하고자 사기 한번 쳐 본 적 없수다.
내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운이 안 따른 건지 돈도 못 모았수다.
그러다 내 나이 스물여덟에 함바집에서 일하던,
나보다 열 살 연상의 여자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수.
그 여자가 나 같은 놈 뭘 보고 같이 살겠소?
오로지 튼튼한 몸뚱이 하나 본 거겠지.
난 그여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정말로 열심히 일했소.
살림을 합친 지 일 년 지나 딸도 낳고 해서 어깨가 무거웠지요.
낮에는 노가다판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군밤이나 오징어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지요.
그때는 앉기만 하면 졸 정도로 힘들고 피곤한 시기였지만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소.
한 삼년 죽자사자 매달리니까 돈이 제법 모이더라고요.
한 이년만 더 모아서 생맥주집이나 식당 같은 걸 차릴 생각이었는데,
그만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발을 헛디뎌 삼층에서 떨어지고 만거요.
다행히 바닥에 모래가 깔려있어 생명은 건졌지만 허리 병신이 된 거요.
아내는 침이다 뜸이다 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용하다는 한의사를 데려왔지만
한번 어긋난 허리는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죠.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는 거요.
옆집 홀아비와 눈이 맞아 애도 버리고 모아놓은 돈도 갖고 튀었지 뭐요.
난 애 때문이라도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소.
아픈 허리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껌이나 초콜릿을 가지고 다니며 팔곤 했소.
그러다 며칠 전에 같이 공사장에서 일했던 가리봉동 김씨를 만났지 뭐요.
이야기 도중에 김씨가 보상금은 어디다 쓰고 이러고 다니냐고 하지 않겠소?
순간, 귀가 번쩍 뜨입디다.
지난 가을인가?
중을 우연히 만났는데 여기 왼쪽 팔뚝에 그려진 불상 모양의 하얀 점을 보더니 아 글쎄,
조만간 내가 엄청난 부자가 된다고 하지 않겠소?
난 그때는 그냥 흘러 버리고 말았는데 가리봉동 김씨의 말을 들으니 바로 이거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보상금이나 두둑히 뜯어내려고 집장사를 하던 홍 목수를 찾아갔지 뭐요.
그런데 그 썩어 문드러질 놈이 내게 뭐라는 줄 아슈?
나 때문에 공사를 망쳤다면서 맞고소를 하겠다는 거요.
성질 같아서는 고발을 해 버리고 싶지만
당장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 내가 무슨 돈으로 변호사를 부르겠소?
한 가닥 남아 있던 희망마저 사라지자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싸그리 사라집디다.
어린 딸년만 아니면 진작에 뒈져 버렸을텐데...
그 어린 것이 뭔 죄가 있겠소?
부모 잘못 만난 죄밖에...라면 한 개 사놓고 나왔는데 끓여 먹었는지 모르겠구만....
아줌마, 나 미리 자수하는데 나 돈 한푼 없수다.
하지만 술은 더 마시고 싶소.
이 문호엽이 은혜 모르는 놈 절대 아니오.
돈 생기면 반드시 갚을 테니 오늘 나 술 좀 마시게 해주슈.
참, 나한테 돈은 없지만 여기 이천원짜리 또또복권이 석 장 있소.
만약 당첨된다면 아마 오억까지는 받을 수 있을 거요.
얼마전 뉴스를 보니까 고스톱 치다가 받은 오백원짜리가 일등에 당첨 됐읍디다.
혹시 아오, 아주머니에게 그런 행운이 올지...
문씨는 긴 이야기를 끝내고 주인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그녀는 싱긋 미소를 띄웠다.
다 이해한다는 듯이...

" 댁도 참으로 박복하구려. 좋은 인생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겠지요."

" 호홋!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과연 그날이 올까요?"

" 네?"

" 아, 아뇨. 이야기 잘 들었소. 내 오늘 문씨에게 술 한잔 사리다.
복권하고 당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 고맙수다. 이 문호엽이가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오늘 마신 술 값은 반드시 갚겠소."

" 술갚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많이 하시구려."

머리에 빨간 핀을 꽂은 아주머니는 빈 접시를 걷어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 갔다.
그때 외눈박이 고양이는 한쪽에서 피 묻은 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 어떤 놈이야?"

노란 핀을 꽂은 아주머니가 칼질하며 물었다.

" 인생의 쓴맛이란 쓴맛은 모조리 핥은 놈팽이야.
더 이상 떨어질 데도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놈이지."

" 그럼 이제는 인생의 단맛을 볼 차례겠군."

"그렇지! 하지만 놈은 영원히 인생의 단맛을 못 보겠군.
아주 재밌는 놈이 제발로 기어들어 왔군.내가 놈을 요리하지."

"나비가 먹고 있는 저건 뭐야?"

"어디선가 털복숭이 개 한 마리를 물어 왔더라고.
나비야,이리와! 고양이가 개를 잡아먹는 걸 남들이 보면 얼마나 놀라겠어?
내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지?"

노란 핀을 꽂은 그녀는 나비의 허벅지를 긋자 피 한방울이 술병 안으로 떨어졌다.
나비는 아픈지 `캬오옹!' 하며 살점이 묻어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 , 알았다. 내가 오늘 저놈을 너에게 넘겨주마. 실컷 먹어라."

빨간 핀을 꽂은 아주머니가 문씨의 술상으로 나비의 피가 섞인 술을 안주와 함께 가져다 주었다.
문씨는 술을 갖다 주는 대로 마셨다.
아무리 마서도 취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가끔씩 떠오르곤 하던 진아 생각도 이내 잊혀졌다.
술에서는 약간의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으나 맛은 기가 막혔다.
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았다.
문씨는 기분이 좋아져서 술을 따라서 입 안에 단숨에 털어 넣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리곤 한 방울이라도 흘렸을까 봐 혀로 입술 전체를 핥곤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씨는 아빠를 기다리다 배를 움켜 쥐고 잠들어 있을 진아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도 애처로운 모습이었지만 문씨는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몇 잔을 연거푸 비우다 보니 진아의 모습이 사라졌고 헛웃음이 나오면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 시간 앉아 있었지만 허리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같아서는 다시 노가다판에서 일도 할 수 있을것 같았다.
문씨는 부지런히 술잔을 비우다가 사물들이 하나씩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술잔마저 사라져 버렸을때 문씨는 탁자 위에 머리를 박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렇게 많던 손님은 다 떠나가고 술집에는 문씨밖에 없었다.
건너편 탁자에는 덩치가 큰 외눈박이 고양이가 뚫어지게 문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씨가 술을 마시고 나서 그랬듯이 혓바닥으로 입을 핥으면서...
문씨는 기분 나쁜 고양이를 쫓으려고 팔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어서려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정신도 말짱하고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몸만은 움직일 수 없었다.
탁자에 고개를 박은 채로 고양이 뒷편에 서 있는 벽을 보았다.
메뉴가 붙어있어야 할 자리에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스마일'이라는 술집이 아닌, 아주 낯선 방이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악몽을...
문씨는 고양이의 타오르는 파란 눈동자를 보다가 눈을 감으려했다.
하지만 눈꺼풀마저 움직일 수 없었다.
외눈박이 고양이가 건너편 탁자에서 폴짝 뛰어왔다.
그리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더니 앞발을 들어올렸다.

"저, 저리 가!"

문씨가 다급히 외쳤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고양이는 아무 망설임 없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문씨의 눈동자를 할퀴 었다.
문씨는 눈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꿈이 아니었다.
꿈이라면 이렇게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고양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문씨의 얼굴을 그어 댔다.
피가 튀었다.
남아 있는 한 쪽 눈으로 핏물이 스며들었다.
사, 살려주세요!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고 질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고양이는 이번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입을 쩍 벌리고 다가오더니 문씨의 코를 덥썩 물었다.
문씨는 바로 눈 앞에서 고양이가 자신의 코를 쩝쩝거리며 먹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귀를 물어 뜯으려는 순간, 귀에 익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나비야, 그만 먹어. 너무 많이 먹으면 의심받아. 문씨, 술 실컷 마셨어?
이제.....술값을 내야지! 흐흐흐...."

머리에 노란 핀을 꽂은 여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유리접시를 번쩍 들어 사정없이 얼굴에 내리쳤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문씨는 얼굴에 예리한 것이 날아와 박히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문씨는 죽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끔찍한 공포여서 어서 빨리 생명이 끊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진아의 얼굴이 한 순간 어둠 속에 떠올랐다가 멀어져 갔다.
사방의 빛이 조금씩 꺼져 가고 있었다.
술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 큰일 났어요! 손님 한 분이 술 드시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유리접시에 얼굴을 다쳤는지 피투성이에요.
빨리 구급차를 보내주세요.
여기요? 반포에 위치한 스마일이라는 술집이에요."

다음날.
저녁 여섯시 반이 되자 '스마일'이라는 술집 입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가게는 텅 비어있었다.
머리에 노란 핀을 꽂은 여자는 석간 신문을 뒤적이다가
무릎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나비야, 오늘은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많이 실렸구나. 너도 볼래?"

그녀는 신문 사회면을 활짝 펼친 뒤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 나갔다.

- 한국 복권 사상 최대의 당첨금 6억 5천만원, 술값으로 지불!
1차 2차 계속해서 당첨자를 못내 6억 5천만원까지 당첨금이 불어나던 또또복권 행운의 당첨자는
모 술집 여주인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복권은 여주인이 구한것이 아니라
술값 대신 받은 것으로 밝혀져 장안의 화제가 되고있다.

- 사채계의 큰손 최 할머니 35년전에 버렸던 아들 찾아 나섰다!
사채계의 거부로 알려진 최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35년전에 버렸던 핏줄을 찾겠다고 팔걷고 나섰다.
최 할머니의 전재산을 물려받게 될 행운의 상속자는 문호엽으로서,
왼쪽 팔뚝에 불상 모양의 흰점이 있다고...
최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정확한 재산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 할머니는 자식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5천만원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정식으로 공고했다.

- 밤새 장마로 잇단 피해!
며칠째 계속된 장마로 전국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어젯밤에도 XX동 산1번지에서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축대 밑에 살고 있던 문진아(6세)양이
흙더미에 깔려 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축대에 심한 균열이 생긴 것을 발견한 이웃 주민들은 잠시 피하라고 진아 양에게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아빠를 기다린다며 끝끝내 말을 듣지 않다가 변을 당해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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